6부. 오늘의 고타마 — 2,500년 전 철학은 지금도 유효한가?
6부. 오늘의 고타마 — 2,500년 전 철학은 지금도 유효한가?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누군가의 성과와 소득, 집과 여행, 외모와 인간관계를 보며 내가 뒤처진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접하는 타인의 삶은 대개 잘 정리된 장면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장면을 온전한 삶의 모습처럼 받아들이고, 보이지 않는 자신의 일상과 비교한다.
비교를 멈추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비교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 목표를 낮추면 안주하는 사람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한다. 이런 마음을 2,500년 전 인도의 수행자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앞선 글에서는 초기 경전에 전해지는 고타마의 생애와 『숫타니파타』, 그리고 괴로움과 집착에 관한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이제 질문을 오늘로 가져와 보자. 비교와 경쟁 속에서 마음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서 살아간다는 말은 관계를 끊으라는 뜻일까? 괴로움을 줄인다는 것은 세상의 부당함을 참고 견디라는 뜻일까? 종교적 믿음이 없는 독자도 초기 불교를 읽을 수 있을까?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하자. 아래의 사례는 고타마가 오늘날의 사회관계망 서비스나 직장 문화를 직접 설명했다는 뜻이 아니다. 고대 경전에 담긴 문제의식을 현대의 상황에 비추어 읽는 해석이다. 또한 초기 불교는 단순한 심리 요법이나 자기계발법이 아니었다. 윤리와 수행, 지혜, 업과 재생에 대한 관점을 포함한 종교적·철학적 전통이었다. 오늘의 삶과 연결해 읽되, 원래의 맥락을 지워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1. 비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비교는 언제나 해로운 것일까? 다른 사람의 실력을 살펴 배우거나, 나의 부족한 점을 발견해 성장하는 데 비교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문제는 비교가 어느 순간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경우다.
동료의 승진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아 새로운 능력을 익힐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성공을 곧 나의 실패로 받아들이면 축하와 배움의 여지는 사라지고, 질투와 자기비난만 남을 수 있다. 누군가의 좋은 소식이 내 삶의 결핍을 증명한다고 느낄 때, 비교는 정보를 주는 활동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습관으로 바뀐다.
『법구경』의 한 게송은 승리는 적의를 낳고 패배한 사람은 괴로움 속에 잠들지만, 승패를 내려놓은 사람은 평온하게 산다는 취지로 말한다. 이를 경쟁 자체가 나쁘다는 주장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는 평가와 경쟁이 존재하고, 때로는 부당한 경쟁에 맞서야 한다. 다만 이기고 지는 결과를 자기 존재의 전부로 삼으면 승리조차 오래가는 평안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다.
비교의 습관을 살펴보기 위해 세 가지를 물어볼 수 있다.
- 나는 이 사람에게서 실제로 배우려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낮추기 위해 비교하는가?
- 지금 원하는 것은 구체적인 목표인가,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인인가?
-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다른 가치와 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야망을 버리라는 명령이 아니다. 목표를 가지되 목표가 자신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살피자는 제안이다. 고타마에게 귀속되는 가르침을 현대의 경쟁 문화에 적용할 때, 중요한 것은 성공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붙이는 의미를 돌아보는 일이다.
2. 견해가 다르면 왜 적이 되는가?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해하는 나름의 관점을 갖는다. 정치와 종교, 교육과 육아, 일과 돈에 관한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 문제는 의견이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해할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때 생긴다.
『숫타니파타』의 「파수라경」은 논쟁에서 자신의 견해만이 진리라고 내세우며 상대를 어리석다고 여기는 태도를 비판한다. 이 가르침은 모든 주장이 똑같이 옳다는 상대주의와는 다르다. 어떤 주장에는 더 좋은 근거가 있고, 어떤 행동은 실제로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 다만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논쟁에서 이기는 일을 진리를 찾는 일과 혼동하지 말라는 경고로 읽을 수 있다.
현대의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 경고가 더욱 낯익게 들린다. 우리는 긴 설명보다 짧고 강한 문장을 빠르게 공유하고, 상대의 주장을 가장 약한 형태로 요약해 공격하기도 한다. 반대 의견을 만났을 때 상대의 근거를 확인하기보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소속을 먼저 판단한다. 어느 순간 토론은 무엇이 참인지 살피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 편과 저쪽 편을 가르는 의식이 된다.
의견을 검토할 때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 사실에 관한 질문: 어떤 자료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가?
- 가치에 관한 질문: 우리는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 정체성에 관한 반응: 내가 이 주장을 틀렸다고 인정하면 내 소속이나 자존심이 흔들리는가?
이 구분은 모든 갈등을 없애지는 못한다. 하지만 근거에 관한 논의를 자존심의 싸움과 분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필요한 경우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는 것도 패배가 아니라 이해의 진전일 수 있다.
고타마의 가르침을 오늘날의 토론에 적용한다면, 질문은 ‘나는 어떤 편인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 생각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까지 나아갈 수 있다.
3.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관계를 끊으라는 뜻일까?
『숫타니파타』의 「무소의 뿔 경」에는 널리 알려진 표현이 반복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오늘날 이 문장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독립적으로 살라는 격언처럼 인용된다. 그러나 원문의 맥락은 단순한 자기계발 문구보다 구체적이다. 출가 수행자가 감각적 욕망과 얽힌 관계, 번잡함과 집착에서 벗어나 수행의 자유를 지키는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이 경을 모든 사람에게 가족이나 친구를 멀리하라는 조언으로 옮기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경 안에는 함께 지낼 만한 지혜롭고 성실한 동반자를 만난다면 기쁘게 함께 가고, 그런 동반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홀로 가라는 취지의 구절도 있다. 고립 그 자체를 무조건 이상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점은 오늘날의 인간관계에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모든 순간에 응답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기대를 거절하지 못하고, 소속에서 밀려날까 두려워 자신의 가치관을 숨길 때도 있다. 관계는 삶의 중요한 자원이지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판단과 평온을 계속 포기한다면 연결은 집착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혼자 있는 시간이 언제나 자유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외로움과 고립은 실제로 고통스러울 수 있으며, 도움을 요청하고 서로를 돌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혼자서 가라”를 오늘의 삶에 적용할 때는 관계를 끊으라는 지시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읽는 편이 적절하다.
- 이 관계에서 나는 서로를 존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정받기 위해 나를 지우고 있는가?
-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해서 원하지 않는 관계를 계속 붙잡고 있는가?
- 나의 자유뿐 아니라 상대의 자유와 경계도 존중하고 있는가?
-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건강한 관계가 있는가?
고독은 때때로 자기 생각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관계와 돌봄도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혼자냐 함께냐라는 선택 자체보다, 그 관계가 탐욕과 두려움에 의해 유지되는지, 지혜와 배려 속에서 이어지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4. 불안을 없애려 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까?
불안은 미래를 통제하고 싶다는 마음과 밀접하게 연결될 때가 있다. 발표가 잘못되면 어떡할지, 관계가 끝나면 어떡할지, 건강이나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한다. 걱정에는 실제 위험을 준비하도록 돕는 기능도 있다. 모든 걱정이 쓸모없거나, 불안한 사람에게 그저 마음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상윳따 니까야』 36.6 「화살경」은 괴로움을 두 개의 화살에 비유한다. 첫 번째 화살은 실제로 겪는 아픔이다. 두 번째 화살은 그 아픔에 더해지는 반응을 가리킨다. 경전의 가르침은 고통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이 생겼을 때 거기에 저항과 집착, 혼란이 어떻게 더해지는지 알아차리라는 취지다.
예를 들어 면접에서 탈락하면 실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결과를 돌아보고 다음 기회를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할 사람이다”, “이번 일로 내 미래는 끝났다”는 결론을 덧붙인다면 한 번의 실망이 자신 전체에 대한 판결로 커진다. 실제 사건과 그 사건에 붙인 해석을 잠시 구분하는 것은 두 번째 화살을 살펴보는 한 방법이다.
다음에 마음이 크게 흔들릴 때 아주 짧게 멈춰 볼 수 있다.
첫째,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적는다. 추측이나 평가를 덧붙이기 전에 확인된 사실을 구분한다.
둘째, 지금 느끼는 감정을 알아차린다. 불안, 분노, 수치심, 슬픔 등 무엇이든 이름 붙여 볼 수 있다.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를 또 비난하지 않는다.
셋째,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을 찾는다. 상황을 확인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부분과 실제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을 구분한다.
이런 연습이 모든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문제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주변의 지원이 필요하고, 오래 지속되는 불안이나 우울에는 적절한 전문적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두 번째 화살의 비유를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 비유가 묻는 것은 ‘왜 괴로워하느냐’가 아니라, ‘이미 아픈 상황에서 어떤 반응이 괴로움을 더 키우고 있으며, 무엇을 도울 수 있는가’에 가깝다.
5. 자애는 약함일까, 경계가 없는 친절일까?
갈등을 줄이는 일은 상대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참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애는 경계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불필요한 해를 바라지 않는 태도와 관련된다.
『숫타니파타』의 「자애경」은 자애를 가까운 사람에게만 향하는 감정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강하거나 약한 존재,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존재 등 모든 생명에게 평안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르라고 말한다. 또한 남을 속이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분노와 악의 때문에 다른 존재가 괴롭기를 바라지 말라는 윤리적 요청을 함께 제시한다.
이 가르침은 감정적으로 모두를 좋아해야 한다는 명령과 다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즉시 따뜻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 반복해서 해를 끼치는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할 때도 있다. 자애를 실천한다는 것은 위험한 관계에 계속 머물거나 잘못된 행동을 용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상대에게 불필요한 보복과 해악을 바라지 않는 태도를 연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상에서 자애는 거창한 감정으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모욕하는 말을 보내기 전에 잠시 멈추는 것, 의견이 다른 사람을 한 가지 실수로만 정의하지 않는 것, 자신의 피로와 한계를 인정하고 필요한 경계를 분명히 말하는 것 역시 자애의 실천과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애가 중요한 이유는 갈등이 언제나 나쁜 감정에서만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를 지키려는 마음도 쉽게 증오와 모욕으로 변할 수 있고, 정당한 비판도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순간 또 다른 해악을 낳을 수 있다. 자애는 비판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과정에서도 불필요한 적대감을 키우지 않을 방법이 있는지 묻는다.
6. 종교를 믿지 않아도 고타마를 읽을 수 있을까?
불교의 모든 종교적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독자도 초기 경전을 읽을 수 있을까? 물론 읽고 질문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지워 버린다면, 역사적 문헌을 읽기보다 현대인의 생각을 고대 문헌에 비추어 보는 데 그칠 수 있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경전이 『앙굿따라 니까야』 3.65, 이른바 「칼라마경」이다. 이 경은 전승이나 소문, 경전의 권위, 논리적 추론, 말하는 사람의 명성만으로 어떤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취지로 자주 인용된다. 그래서 ‘직접 확인한 것만 믿어라’ 또는 ‘전통을 모두 의심하라’는 선언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칼라마경의 내용은 단순한 개인주의적 회의론이 아니다. 경 속에서 고타마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이 해로움으로 이어지는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일이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라고 한다. 판단의 기준에는 행위의 결과, 지혜로운 이들의 평가, 해로운 상태와 유익한 상태의 차이가 포함된다. 경은 또한 업과 다음 생에 관한 당시의 종교적 질문을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칼라마경을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어도 된다’는 말로 사용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떤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권위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되, 자신의 선입견 역시 검토하고, 그 생각과 행동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 살펴보라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현대 독자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 역사적으로: 이 가르침은 어떤 시대와 사상적 환경에서 나왔는가?
- 철학적으로: 이 주장은 무엇을 전제하고 있으며, 어떤 근거를 제시하는가?
- 실천적으로: 이 가르침을 적용할 때 자신과 타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는가?
세 방식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해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며, 실천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해서 원래의 종교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종교적 전통에 속한 가르침이라고 해서 철학적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고타마를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믿거나 반드시 부정하는 선택을 먼저 하는 일이 아니다. 문헌을 제대로 읽고, 근거를 확인하며,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정확히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시작할 수 있다.
7. 고타마의 가르침은 모든 문제의 해답일까?
오래된 철학을 오늘의 삶과 연결하다 보면, 한편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처럼 만들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비교를 멈추고, 집착을 내려놓고, 자애로운 마음을 기르면 고통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실제 삶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사람이 겪는 고통에는 자신의 반응뿐 아니라 외부의 조건도 작용한다. 빈곤과 차별, 폭력, 질병, 불안정한 노동 환경, 돌봄의 부담은 개인의 생각만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때로는 관계를 끊는 결단보다 법적·경제적 지원이 필요하고, 마음을 관찰하는 것보다 안전한 환경으로 옮기는 일이 우선이다. 고통을 줄이려는 실천은 개인의 마음과 행동뿐 아니라 타인의 행동과 사회적 조건을 바꾸려는 노력도 포함할 수 있다.
초기 불교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독특한 분석과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을 오늘의 삶과 연결할 수는 있지만, 현대 심리학이나 사회과학과 동일한 이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치료법이나 사회 제도의 필요성을 가르침 하나로 대체할 수 없다.
가장 좋은 독법은 아마도 이 두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500년 전의 가르침이 낡았다고 미리 판단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한 완벽한 답이 이미 그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 대신 구체적인 질문을 들고 경전을 읽고, 그 가르침이 무엇을 설명하며 무엇까지 설명하지는 않는지 함께 살펴볼 수 있다.
8. 오늘의 삶에 적용해 보는 작은 질문들
지금까지의 논의를 자기 점검에 활용하고 싶다면, 하루를 마무리하며 아래 질문 가운데 하나만 골라 살펴보아도 좋다.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니라 자신의 반응을 알아차리는 질문이다.
- 오늘 나는 누구와 나를 비교했는가? 그 비교는 배움으로 이어졌는가, 자기비난으로 이어졌는가?
- 오늘 어떤 의견을 지키기 위해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었는가?
- 혼자 있을 때 나는 편안했는가, 아니면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려웠는가?
- 실제로 아팠던 사건과 그 사건에 덧붙인 해석을 구분할 수 있는가?
- 내가 지켜야 할 경계를 세우면서도 불필요한 해악을 줄일 방법은 무엇인가?
- 내가 믿고 있는 생각은 어떤 근거에 기대고 있으며, 어떤 증거가 나타나면 수정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늘 현명하게 답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어서는 오히려 역효과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해지는 일이 아니라, 평소 자동적으로 반응하던 순간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는 것이다.
맺으며 — 부처를 믿는가, 그의 질문을 이어 가는가?
이 시리즈는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부처의 모습에서 신비로운 탄생과 기적, 후대의 종교적 표현을 잠시 구분해 보면 어떤 인간과 사상이 보일까? 이름의 기원과 출가의 전승, 『숫타니파타』의 시와 문답, 초기 불교의 괴로움에 관한 분석, 붓다를 기억하고 예경해 온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분명해진 것은 ‘인간 고타마’와 ‘신앙의 대상인 붓다’가 반드시 서로를 지워야 하는 두 모습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 고타마를 탐구하는 일은 후대 불교의 신앙을 조롱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후대의 붓다관을 이해하는 일 역시 초기 경전의 역사적 맥락을 질문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와 신앙, 철학은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지며, 그 차이를 인정할 때 오히려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해진다.
오늘의 독자에게 남는 질문은 어쩌면 단순하다. 나는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고통을 겪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필요한 도움을 구하는가, 아니면 스스로에게 더 큰 비난을 덧붙이는가? 나의 자유를 바라듯 다른 존재의 안녕도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경전 한 권에 완성된 형태로 들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오래된 문헌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의 습관을 낯설게 바라볼 기회를 준다. 그것은 믿음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고타마를 읽는다는 것은 그를 오늘날의 언어로 손쉽게 바꾸는 일도, 그와 관련된 모든 전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도 아닐 것이다. 먼저 그가 어떤 질문을 던졌다고 전해지는지 정확히 살펴보고, 그 질문이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비추는지 천천히 묻는 일일 것이다.
부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을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오래된 가르침을 오늘 다시 읽을 이유다.
참고 경전 및 더 읽을 자료
- 『숫타니파타』 1.3 「무소의 뿔 경」 — 홀로 수행하는 삶과 좋은 동반자에 관한 구절
- 『숫타니파타』 1.8 「자애경」 — 모든 존재를 향한 자애와 비해침
- 『숫타니파타』 4.8 「파수라경」 — 견해를 둘러싼 논쟁과 독단에 관한 문답
- 『상윳따 니까야』 36.6 「화살경」 — 실제 고통과 그에 더해지는 정신적 반응
- 『앙굿따라 니까야』 3.65 「칼라마경」 — 권위와 소문, 해로운 행위와 유익한 행위를 검토하는 기준
- 『법구경』 201절 — 승리와 패배, 적의와 평온에 관한 게송
- Secularising Buddhism: New Perspectives on a Dynamic Tradition (2024) — 현대 사회에서 불교와 마음챙김이 해석되는 방식에 관한 학술적 논의
읽을 때 기억할 점
초기 경전은 역사적 고타마의 말을 그대로 녹음한 기록이 아니다. 오랜 구전과 전승을 거친 문헌이며, 편집 시기와 전승 계통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이 글의 현대적 사례는 경전의 문제의식을 오늘의 삶에 비추어 본 해석이지, 고타마가 현대 사회의 상황을 직접 다루었다는 뜻이 아니다. 번역본마다 용어와 문장 표현이 다를 수 있으므로, 중요한 구절은 가능한 한 여러 번역과 주석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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